민요가 많은 지역입니다.
즉, 지역에 뿌리내린 문화가 음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왔다는 증거네요.
계절적인 사건을 노래한 곡이 주류이며, 그 내용은 일본적인 심미감이 표현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.
지금이라면 일본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에게 수요가 있을 것 같네요.
꼭 한번 확인해 보세요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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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와테의 민요·동요·아이 노래. 노래로 이어지는 고향의 마음(1~10)
난부 우시아와세타이와테 현 민요

애수를 띤 선율과 깊은 정감으로 이와테 남부 지방의 풍토와 역사를 오늘에 전하는 이와테 현민요입니다.
농경과 운반에 없어서는 안 될 소를 모는 사람들의 노동가로 태어나, 지역에 뿌리내린 전통으로서 세대를 넘어 노래되어 왔습니다.
쇼와 초기에는 빅터와 콜롬비아에서 레코드로 제작되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요.
이와테현의 관광 PR이나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다루어지며, 지역의 축제와 이벤트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.
웅대한 이와테의 자연을 떠올리며 듣고 싶은 이 작품은,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품은 분이나 일본의 전통음악을 접하고 싶은 분에게 안성맞춤인 한 곡입니다.
기쁜 히나마쓰리구와나 사다코

일본의 명곡 100선 중 하나로 뽑힐 정도로 큰 인기를 끈 사토 하치로 작사의 동요입니다.
어린 시절에 불렀던 기억이 있는 분들도 많지 않을까요? 사실 히나 인형의 묘사로서는 틀린 부분이 있어, 사토 하치로 본인도 말년까지 그 점을 신경 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.
빙글빙글절화양회/하나미즈키

현재 이치노세키시의 농촌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손뜨기 화지를 만들어 왔습니다.
풀어 놓은 닥나무 섬유를 저을 때 불렀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.
또한, 원래는 정월에 찾아오는 광대들이 부르던 것으로, 농민들이 그것을 외워 따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.
난부 소몰이 노래후쿠다 코헤이

니시와가마치의 사와우치 지방 등에서 수확한 쌀을 쌀창고가 있는 성곽 도시까지 운반할 때 소몰이꾼들이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.
참고로, 이와이즈미정에 있는 주민회관 대강당에서는 매년 9월 마지막 토·일요일에 난부 우시오이타(소몰이 노래) 전국대회가 개최됩니다.
산속의 삼나무 아기히바리 아동 합창단

산의 삼나무 아기도 사토 하치로의 대표곡으로 알려져 있지만, 원래 가사를 쓴 사람은 다른 작사가였습니다.
애초에는 전사한 아버지를 둔 아이를 격려하는 내용의 노래였지만, 전시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로 사토 하치로가 개작하여 현재의 가사가 되었습니다.
산사오도리 노래이와테 현립 고즈카타 고등학교 음악부

‘산사오도리’라는 본오도리 때 불리는 힘찬 노래입니다.
산사오도리는 원래 각 지역에서 각각 행해졌지만, 1978년에 관광 진흥을 겸해 이것들이 통합되어 ‘모리오카 산사오도리’가 되었습니다.
매년 8월 1일부터 4일까지 개최됩니다.
난부 나가우타나카야시키 아키라

장모치 노래는 결혼할 때 불리는 노래로, 원래는 신부 행렬 때 긴 상자를 메고 노래했던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습니다.
이 노래는 시즈쿠이시초와 니시와가초 등지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.
신랑 측 집과 신부 측 집에서 서로 다른 가사를 부르는 등, 다양한 규칙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.






